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714 바깥에 갇히다/정용화 바깥에 갇히다/정용화 우리 집 현관문에는 번호키가 달려있다 세 번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면 가차 없이 문이 나를 거부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 제대로 바깥에 갇히고 말았다 안과 밖이 전도되는 순간 열리지 않는 문은 그대로 벽이 된다 계단에 앉아있는 30분 동안 겨울이 왔다 바람은 골목을 넓히려는 듯 세차게 불고 추위를 모르는 비둘기는 연신 모이를 쪼아댄다 내 것이면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어디 문뿐이겠는가 낡을 대로 낡아버린 현수막이 바깥에 갇힌 나를 반성도 없이 흔든다 걸터앉은 계단이 제멋대로 흩어지는 길 위의 낙엽이 새들이 자유롭게 풀어놓은 허공이 나를 구속하고 있는 바깥이라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는 지금 바깥이다. 2023. 6. 18. 보랏빛, 그 꽃잎 사이/김우진 보랏빛, 그 꽃잎 사이/김우진 1. 고향에서 감자 한 상자를 보내왔다 감자 꽃에 앉았던 땡볕도 테이프에 끈적끈적 묻어있다 호미에 딸려 나온 하지의 낮달과 밭고랑을 지나던 바람도 따라왔다 끼니마다 밥상에 고향의 안부가 올라왔다 어느 날 상자 안을 들여다보니 몇 개 남은 감자들이 허공을 향해 하얀 발을 뻗고 있었다 먼저 나가려고 발들이 서로 엉켰다 흙이 그리운 감자들을 고이 화분에 묻어주었다 2. 보랏빛, 그 꽃잎 사이로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른 어머니가 보인다 밭고랑에 엎디어 감자밭을 매다가 어린 내 발소리에 허리를 펴던, 찢어진 검정고무신 밖으로 삐죽 나와 있는 흙 묻은 발가락, 오늘 그 어머니를 만났다 뻐꾸기시계가 감자 꽃을 물고 온 날이었다 2023. 6. 18. 길 위의 경전/신병은 길 위의 경전/신병은 청개구리 한 마리 폴짝 폴짝 4차선 아스팔트 길을 건넌다 고라니와 노루와 달리 너무 작아 더 위험한 청개구리는 세 번 뛰었다가 한 번 쉬고 두 번 뛰었다가 또 한 번 쉬고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해도 중앙선을 넘지 못한다 한 순간에 정지되어 버릴 것 같은 숨죽인 풍경,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넌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인 것을 납작하게 엎드렸다 발바닥 땀나게 뛰어도 길 건너 저쪽 청개구리 울음소리 아직 멀다 건너서 닿아야만 하는 너의 사랑을 몰래 읽는다 2023. 6. 9. 봄은 전쟁처럼/오세영 봄은 전쟁처럼/오세영 산천은 지뢰밭인가 봄이 밟고 간 땅마다 온통 지뢰의 폭발로 수라장이다. 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푸르고 붉은 꽃과 풀과 나무의 어린 새싹들. 전선엔 하얀 연기 피어오르고 아지랑이 손짓을 신호로 은폐중인 다람쥐, 너구리, 고슴도치, 꽃뱀... 일제히 참호를 튀어나온다. 한 치의 땅, 한 뼘의 하늘을 점령하기 위한 격돌, 그 무참한 생존을 위하여 봄은 잠깐의 휴전을 파기하고 다시 전쟁의 포문을 연다. 2023. 5. 18. 이전 1 ··· 16 17 18 19 20 21 22 ··· 17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