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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714

새벽시장/정연홍 새벽시장/정연홍 키를 꽂으면 부르르 몸을 떤다 하품을 하며 일어나는 바퀴 달린 코뿔소 사내는 엑셀러레터를 깊이 밟는다 드문드문 불 켜진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그들의 실루엣 어둠 속 고양이들이 청소부의 빗자루를 툭툭, 건드리는 사이 간밤의 오물자국들이 바퀴에 눌러 흩어진다 골목길이 급히 허리를 휠 때마다 조수석 여자가 자리를 고쳐 앉는다 뒤로 젖힌 그녀의 얼굴에 선잠이 머리칼처럼 흘러내린다 사내는 여자를 돌아보고 잠시 웃는다 저들이 살아왔던 길들도 저렇게 급커브였을까 수금되지 않던 수수수 단풍잎 밤이 되면 안방까지 점령하던 빚쟁이들, 이삿짐을 꾸리던 그날 밤도 골목길은 휘어져 있었다 새벽 야채시장, 밤새 달려왔을 초록의 잎들이 사내의 트럭으로 옮겨진다 아무렇게나 던져 넣어도 척척 자리를 잡고 정좌하는.. 2023. 5. 15.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김경주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커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던, 그 속에서 하늘하늘한 팬티 한 장 꺼내들고 어머니 볼에 따뜻한 순면을 문지르고 있다 안감이 촉촉하게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한 무늬였음을 오늘은 죄 많게 그 꽃무늬가 내 볼에 어린다 어머니 몸소 세월로 증명했듯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 순간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팬티들은 싱싱했던 것처럼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않았으리라 빨랫줄에 하나씩 열리는 팬티.. 2023. 5. 14.
아버지의 마음/김현승 아버지의 마음/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 2023. 5. 8.
산벚 등고선/최연수 산벚 등고선/최연수 하얗게 바깥이 저민다 햇살이 소금에 절인 듯 그늘이 파닥거리고 푸른 꽁지를 흔드는 산벚 등고선 밖으로 쿨럭 늦봄을 토해놓는다 공기를 따라 휘는 파문은 차가운 지도를 헤엄쳐 나온 나이테 한철 살아본 것들이 가지는 물결무늬다 나부끼는 허공을 따라가면 식욕 왕성한 오후가 바람을 층층 발라낸다 너와 나의 한때도 미처 지우지 못한 아린 냄새로 한순간 수로를 거슬러 오른다 가장 절정으로 기우는 추억 가장 낮게 허물어지는 잠 앙상한 뼈들을 숨기기 위해 살집을 늘린 나무가 지느러미를 부풀린다 잘 헤엄칠 수 있도록 유리창이 제 안을 말갛게 닦는다 2023.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