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714 말굽자석/이삼현 말굽자석/이삼현 극과 극은 상극이라서 서로 밀어내기에 바쁘다 어린 시절 장난감 대신 가지고 놀았던 막대자석 나는 에스극이라서 엔극인 엄마 품에 찰싹 달라붙어 살았다 그럴 때마다 안아주던 감촉은 살가웠다 다 큰 녀석이 언제까지 엄마 젖꼭지나 빨고 있을 거냐 흉봐도 떨어질 줄 몰랐다 철이 들면서부터 또래 친구들에게 더 이끌려 조금씩 멀어진 엄마 엔극이 빨강이라면 에스극은 파랑 모자(母子)는 한 몸이지만 처음부터 색이 다르다는 걸 알고나 있었을까 자력에 끌려 결혼하고 팔과 다리에 엉겨 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피붙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가끔 엄마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통념대로 살아가기에 바빴다 이순이 넘어서서야 외딴곳에 방치된 엔극을 찾아갔다 그새 구부러져 말굽자석이 된 엄마 부스럭거릴 때마다 뚝, 뚝 빨간 녹을 .. 2023. 7. 3. 갯벌도서관 권여원 갯벌도서관 권여원 썰물에 열리는 점자도서관 밤새 불어난 목록들이 물때에 맞춰 진열되면 하나둘 손님이 들기 시작하지요 어제 대여해 간 태양은 반납이 되어 도서관에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해요 언젠가는 빌려간 책이 돌아오지 않아 며칠째 비가 내린 적도 있지요 농게는 갯벌에 새겨놓은 점자책이 젖었다고 뻘을 말리고 백로는 장문으로 쓴 고둥의 편지를 곁눈질 하고 있어요 고개 숙여 젖은 책을 읽을 때마다 갈매기 사서는 바짝 긴장하지요 목록에서 빠진 것들을 기록해야 하거든요 눈치 빠른 도둑게는 쪽수에 구멍을 내고 글자를 삼키고 있어요 게구멍끼리 이은 점들을 따라가면 도형의 비밀이 풀리거든요 갯벌은 커다란 노트, 새끼 게가 갓 배운 글씨를 비뚤비뚤 뒷발로 쓰고 사람들도 몰려와 호미로 쪽수를 넘기며 뻘밭에 엎드려 바다를 읽.. 2023. 6. 28. 경운기를 부검하다/임은주 경운기를 부검하다/임은주 그는 차디찬 쇳덩이로 돌아갔다 움직이지 못할 때의 무게는 더 큰 허공이다 돌발적인 사건을 끌고 온 아침의 얼굴이 퀭하다 피를 묻힌 장갑이 단서를 찾고 일순 열손가락이 긴장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망치와 드릴이 달려들어 서둘러 몸을 빠져나간 속도를 심문한다 평생 기름밥을 먹은 늙은 부검의 앞에 놓인 식은 몸을 날이 선 늦가을 바람과 졸음이 각을 뜨는 순간,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진흙탕과 좁은 논둑길이 나타난다 미궁을 건너온 사인(死因)에 집중한다 붉게 녹슨 등짝엔 논밭을 뒤집고 들판을 실어 나른 흔적이 보인다 심장충격기에도 반응이 없는 엔진 오랫동안 노동에 시달린 혹사의 흔적이 발견되고 탈, 탈, 탈, 더 털릴 들판도 없이 홀로 2만Km를 달려 온 바퀴엔 갈라진 뒤꿈치의 .. 2023. 6. 28. 밥주걱/박경남 밥주걱/박경남 내 별명은 밥주걱이다 단지 얼굴이 넓적하다는 이유로 붙여진 밥주걱은 딸이 내리 셋인 우리 집에서 다른 형제와 차별된 또 하나의 나였다 노래를 잘하는 언니는 꾀꼬리 얼굴이 아기주먹처럼 참한 동생은 이쁜이 하필이면 나는 밥알 덕지덕지 묻은 볼품없는 밥주걱일까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오를 적마다 별명을 입에 달고 다니던 친척 아저씨를 원망하면서 골목에서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피해다녔다 평생을 꼬리표처럼 지녀야 할 그 이름을 단번에 뗄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스물네 살, 꽃다운 나이라고들 입방아 찧을 무렵 대구의 한 예식장에서 아버지 손잡고 첫 걸음을 옮길 때 "우리 밥주걱 입장합니다!" 나지막한 피아노 선율에 맞추어 목청껏 추임새를 넣듯 친척 아저씨의 엇박자 완창! 봉숭아 씨방 .. 2023. 6. 23. 이전 1 ··· 15 16 17 18 19 20 21 ··· 17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