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714 느티나무/나석중 느티나무/나석중 괜찮다 몸 한구석에 귀뚜라미가 울어도 보이지도 않는 귀뚜라미는 왜 와서 우는지 요즈음 보이지도 않는 아들에게 섭섭한 생각이 들 때 나는 깜짝깜짝 뉘우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나에게 서운한 때 많았을 거라고 그러니 아들아 너는 걱정하지 마라 너도 일가를 이룬 나무, 몰아치는 비바람 잘 견디며 귀뚜라미처럼 괜히 와서 우는 일 없도록, 해가 짧아지면서 오른쪽 무릎에서 악기 소리가 나지만 몸이 알아서 현 한 줄 심심치 않게 튕겨주는 일 이제 뼈가 닳고 가슴이 밭는 일도 괜찮다. 시선집 『노루귀』 도서출판b 2023년 2023. 7. 10. 잠지/오탁번 잠지/오탁번 할머니 산소 가는 길에 밤나무 아래서 아빠와 쉬를 했다 아빠가 누는 오줌은 멀리 나가는데 내 오줌은 멀리 안 나간다 내 잠지가 아빠 잠지보다 더 커져서 내 오줌이 멀리멀리 나갔으면 좋겠다 옆집에 불 나면 삐용삐용 불도 꺼주고 황사 뒤덮인 아빠 차 세차도 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호호호 웃는다 -네 색시한테 매일 따스한 밥 얻어먹겠네 2023. 7. 3. 어머니의 양식/신병은 어머니의 양식/신병은 신호음이 길게 이어진 후에야 어머니는 전화를 받습니다 그렇게 창창하던 분이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이 일용할 양식이 떨어졌는가 봅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무심했던 게지요 어머니는 지금 남아있는 몇 개 목소리로 견디는가 봅니다 가끔 드리는 전화 한 통으로 사나흘을 견디곤 하지만 목소리도 유효기간이 있어 전화로 하는 목소리, 얼굴로 하는 목소리, 장남이 전하는 목소리, 동생이 전하는 목소리의 약발이 각기 다른가 봅니다 그래도 유효기간이 제일 긴 것은 오래전에 세상을 달리한 아버지의 목소리입니다 아버지는 어떤 빛깔로 기억 속에 남아 함께 저물어 가고 있는지 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때면 단번에 눈이 빛나며 '그럼, 니 아버지는 그랬제' 소녀처럼 해맑은 웃음도 띱니다 오늘 아침 한 통의 전화.. 2023. 7. 3. 그녀는 미소를 바른다/최원준 그녀는 미소를 바른다/최원준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며 그녀는 투명하게 포장된다 지하철역 가까운 테이크아웃 커피점으로 들어가 유니폼을 입고 초록 앞치마를 두른다 유통기한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 미소를 얼굴에 바르며 라테 모카 카푸치노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작은 포장들을 건넨다 눈에 익은 포장이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리며 마주친 적이 있었던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다 재빨리 그녀는 미소를 얼굴에 바른다 비슷한 포장이 너무 많아, 입구까지 흘러나온 내용물을 안으로 담으며 그녀는 익숙한 동작으로 작은 포장을 건넨다 커다란 포장이 그녀에게 돈을 주고 작은 포장을 집는다 가끔 까다로운 포장이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대체로 포장들은 온순하다 포장의 생명은 내용물을 드러내지 않는 데 있.. 2023. 7. 3. 이전 1 ··· 14 15 16 17 18 19 20 ··· 17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