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714 나무와 광부/이선식 나무와 광부/이선식 나뭇가지들이 허공의 지층을 파고들어간다 허공은 얼마나 견고한 지 일 년 내내 일 미터도 전진하지 못한다 나뭇가지 좁은 갱도 속 광부(鑛夫)들은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갱도 속에 뼈를 묻었다 대낮의 칠흑 속에서 빛의 광맥을 찾는 나무다 나는 너는 멀고 가 닿아야 할 깊이를 모르니 흰 날들의 향방이 캄캄하다 꽃, 해마다 단 한 번 허락된 등불을 밝혀 길을 찾는 측량 그리고 또 한 해 나의 완성인 너를 찾아 마지막 뼈를 꺼내 허공 속 갱도를 판다 2022. 2. 28. 외출/허향숙 외출/허향숙 먼지처럼 쌓이는 말들을 털어 내고 싶었다 시부모 때문에, 남편 때문에 불쑥불쑥, 시루 속 콩나물처럼 올라오는 말들을 거미줄 치듯 집 안 곳곳 에 걸어 두곤 하였다 하고 싶은 말 혀 안쪽으로 밀어 넣고 이빨과 이빨 사이 틈을 야물게 단도리하곤 하였다 이말산 산자락 근방 카페 창가에 앉아 나만을 위하여 브런치 세트를 주문한다 해종일 하늘을 보다가 빽빽이 들어찬 허공의 고요를 보다가 인체 혈관 3D 같은 한 그루 나무를 보다가 우듬지로 올라간 빈 둥지를 보다가 빈 둥지 같다는 생각을 들여다보다가 카페에 여자를 벗어놓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어머니로 갈아입는다 2022. 2. 28. 새벽/이상국 새벽/이상국 뒷집 부부가 싸움을 한다 누가 들을까봐 어둠으로 가려보지만 턱도 없다 나도 밤중에 그래 봤다 아이들 잠 재워놓고 컴컴하게 뒷집이 힘든 모양이다 언제 떠나 새벽까지 왔는지 남자가 언성을 높이면 여자는 그 소리를 누르느라 애를 쓰는데 그걸 새벽이 다 듣고 있다 2022. 2. 22. 남자를 위하여/문정희 남자를 위하여/문정희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2022. 2. 16. 이전 1 ··· 37 38 39 40 41 42 43 ··· 17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