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714 바람과 깃발/박건호 바람과 깃발/박건호 깃발이 바람을 만나면 춤을 추었고 깃발이 깃발을 만나면 피가 흘렀다 끝내 어느 한 쪽은 찢어져야 안심할 수 있는 우리의 산하 하늘에는 두 개의 깃발이 있었다 별들이 펼쳐 놓은 이야기는 하나 뿐인데 사람들은 가슴속에 활화산을 숨겨 놓고 천둥소리를 숨겨 놓고 우주질서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념과 사상이 피보다 진했던 우리의 반세기 어지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깃발이 바람을 만나면 춤을 추었고 깃발이 깃발을 만나면 피가 흘렀다 2021. 12. 26. 모자이크/박건호 모자이크/박건호 - 심장병동에서 얼마 전에 가슴 뼈를 톱으로 자르고 심장으로 통하는 두 개의 관상동맥을 교체했다 옛날 같으면 벌써 죽어야 했을 목숨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어릴 때는 생각이나 했던가 팔이 부러지면 다시 붙듯 목숨은 다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사금파리를 딛어 발이 찢어졌을 때는 망초를 바르고 까닭없이 슬퍼지는 날이면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커가면서 계속 망가져 갔다 오른 쪽 수족이 마비되고 언어장애가 일어나고 아무 잘못도 없이 시신경이 막히면서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설상가상 어릴 때부터 아파오던 만성신부전이 악화되어 콩팥도 남의 것으로 바꿔 달았다 누구는 나를 인간승리라고도 하지만 이건 운명에 대한 대반란이다 신이 만든 것은 이미 폐기처분되고 인간이 고쳐 만든 모자이크 인생이다 그.. 2021. 12. 25. 아내/심은섭 아내/심은섭 얼굴은 하얀 목련이지만 뒷모습은 사월 초파일이다 나와 함께 한 방향으로 기관총을 쏘는 총잡이다 내가 마른 강물로 흐를 때면 기우제를 지내주는 제사장이고 대기권을 이탈하는 유성을 바라보며 서로 슬픔을 수혈하기도 했다 때로는 통기타 1번 선의 C단조였다가 내가 어둠의 깃발로 펄럭일 때 푸른 새벽을 불러주었다 붉은 장미꽃이 지천으로 핀 5월이면 초병의 눈초리로 경계를 강화하지만 10월이 오면 어김없이 황금불상의 미소를 건네는 능금이다 오랜 생의 전투로 사기가 저하된 패잔병인줄로 알았으나 탄알이 장전된 38구경 6연발 권총 한 자루였다 단단한 몇 개의 고독이 실밥이 터진 나의 정신을 향해 조준사격을 가할 때마다 내 손을 잡고 함께 군가를 불러주는 전우였다 2021. 12. 25. 사막/오스텅 블루 사막/오스텅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1999년 파리교통공단 콩쿠르 우수작) 2021. 12. 20. 이전 1 ··· 46 47 48 49 50 51 52 ··· 17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