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714 가벼운 소멸을 위하여/박현솔 가벼운 소멸을 위하여/박현솔 횡단보도 앞, 남자가 신호등 앞에 서 있다. 깡마른 몸의 지퍼를 열고 튕겨 나올 것 같은 뼈들. 뼈마디와 마디 사이로 개울물이 흐른다. 검은 송사리 떼가 물주름을 물고 간다. 남자의 몸에서 세포 분열을 하는 종양 덩어리들. 점점이 박힌 그것들이 개울가의 징검다리 같다. 때로 물이 불어 생의 너머로 건너갈 수 없는 날도 많았겠지. 그런 날엔 수술 동의서 앞에서 만지작거리던 도장을 물 위에 무수히 찍어 보냈겠지. 신호등이 푸른색이다. 등줄기를 따라 갈기를 휘날리며 솟구치는 현기증. 남자가 휘청거린다. 직립해 있던 뼈들이 함께 휘청댄다. 넘어진 그림자가 스프링처럼 일어서고, 정지된 시간 속으로 나뭇잎들 흘러간다. 건너편 신호등은 두터운 여백을 숨기고 있다. 경계의 이쪽과 저쪽 사이.. 2024. 3. 28. 말뚝에 대한 기억/박현솔 말뚝에 대한 기억/박현솔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새끼들과 장난을 치는 어미 소의 눈망울을 들여다 본 적 있다 아카시아나무 잎사귀에 부딪혀서 급강하하는 햇살의 칼날, 소의 몸통이 무수히 조각난다 아버지 약값을 위해 소를 팔던 날 외양간을 나서는 소의 깊은 눈망울 앞에서 후줄근한 몸뻬 차림의 어머니가 휘청거린다 다음 생엔 네가 내 주인이 되어 만나자꾸나 자꾸만 머뭇거리며 고삐를 넘겨주지 못하는 제 주인의 마음을 읽었는지, 어미 소가 어머니의 손등을 핥아준다 고삐를 잡은 손이 위태롭게 허공을 향한다 무딘 날을 세워 굳은 땅을 갈아엎던 고집으로 무너지는 일가를 지탱해온 어머니, 어머니가 내준 길을 따라 어미 소가 트럭에 오르고 철제문이 소의 그림자를 가두자, 젖을 갓 뗀 새끼, 어미 소를 향해 울음을 내지른다 트.. 2024. 3. 28. 커튼 너머/김시림 커튼 너머/김시림 한밤중 시어머니의 얼굴을 아프게 바라보는 병실 옆 침상, 속삭이는 소리가 숨소리까지 데리고 커튼을 넘어왔다 남자가 손수레를 끌 듯 이끌어 나가면 그 뒤를 밀 듯 간간이 뒤따르는 여자의 목소리 이제 막 발아한 사랑처럼 다정하고 조심스럽고 애틋한… 간이침대에서 선잠 자고 난 아침, 반년째 누워있는 아내를 지극정성 간호하는 남자를 보았다 직장까지 그만두고 바깥을 통째로 말아 병실에 구겨 넣은 채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이별의 경계선에서 겨우 돌아왔다는 60대 초반의 부부 소변주머니 비우는 일도 기쁨이라는 남편은 아내의 궤도를 따라 도는 하나의 위성이었다 2024. 3. 28. 세렝게티 진화론/이중동 세렝게티 진화론/이중동 신생대를 거쳐 온 대평원에는 오랫동안 질서가 유지되었다. 어느 날부턴가 대평원에는 밤낮없이 천둥이 치고 붉은 비가 내렸다.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생기고 붉은 빗물이 고여갔다. 대평원의 짐승들은 붉은 물을 마시며 근근이 목숨을 이어갔다.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뾰족한 가시만 밀어 올렸다. 풀들은 초록을 잃고 붉은 싹을 내밀었다. 날렵한 네 다리로 초원을 내 달리던 얼룩말은 붉은 풀을 뜯더니 송곳니가 자라났고 갈기는 뾰족한 바늘로 덮여갔다. 무리가 곧 생존이던 얼룩말은 서로에게 으르렁거리며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영역을 구축해 갔다. 육중한 몸에 긴 코를 자랑하던 코끼리는 붉은 웅덩이에 진흙 목욕을 한 후 코는 점점 짧아지고 몸은 허약해져 갔다. 코가 자랑이던 코끼리는 납작코가 되어 평원 곳곳.. 2024. 3. 24. 이전 1 ··· 4 5 6 7 8 9 10 ··· 17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