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밭/詩54 높아질수록 작아지다 높아질수록 작아지다 오월 한라산은 태평양에 하반신을 담근 반신욕 자세 사라오름을 돌아 바람길에서 땀을 식히며 백록담에 오르는 길 편백나무숲이 중턱에 쉬어가고 마가목 군락 그리고는 범의꼬리 바위구절초 하늘매발톱꽃이 옹기종기 초등학생처럼 손을 흔드는 그곳 봉우리로 갈.. 2013. 2. 15. 동지 동지 / 김춘기 구름 겨드랑이 속으로 먹다 남은 풀빵 같은 해가 얼굴을 감추자 막걸리 거나한 눈발이 저마다 상모를 돌리네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우 목도리 그 아래 핫팬츠 기린 다리에 얼룩무늬 레깅스 아가씨 소가죽 롱부츠 통통통 크리스마스 캐럴이 눈부시게 깔리는 백화점 전시장 앞 횡단보도를 찍네 토끼 꼬리 반쯤 되는 햇살이라도 그저 아쉬운 동지섣달 밤새워 식구들 빤스, 나이롱 양말 꿰매시던 어머니 지금은 은하수 개울가에서 뭘 하고 계시는가요 당신의 마디 부은 손가락이 빚은 단팥죽 새알 온기가 여섯 피붙이 입안에서 오물오물 돌집 아랫목, 등잔불 아래 화롯불에 둘러앉아 아버지 옛이야기에 귀 모으던 하얀 밤이 베란다 창에 모자이크처럼 박혀있네 동지 구룸 ㅈ.껭이(ㅈ.깡이) 소곱으로 먹단 남은 풀떡 ㄱ.ㅌ은 해가 .. 2012. 12. 21. 대설, 캐시밀론 공장/김춘기 대설, 캐시밀론 공장/김춘기 늦은 아침 출근길 밤새 쌓인 눈이 가루비누 거품처럼 풀리는 거리. 아침 안개가 온기 실은 바람을 불러 폐업 직전 칼국숫집 간판을 감싸고, 버스터미널 진입로 녹슨 맨홀 뚜껑을 씻어내고, 전봇대에 붙은 구직광고 스티커를 말끔히 제거하네 비상등을 켠 자동차들은 잠시 멈춰 그 광경을 차창 안으로 끌어당기며 교대로 광화문교차로를 빠져나가지. 설악산 대청봉 폭설 소식이 교보빌딩 위 전광판에서 붉은빛 두 칸짜리 기차가 되어 터널 속으로 진입하네 정오가 되기 전 대청소를 끝낸 도시 하늘은 유리창처럼 투명해지겠지만, 밤이 되면 하늘은 장막을 치고 또, 구름과 함께 야간작업하겠지 새로 개업한 신발가게 지붕에도, 유치원 미끄럼틀 위에도, 빌딩 뒤켠 바람광장에 누운 노숙인 낡은 천막에도 솜옷을 입.. 2012. 11. 9. 상강, 백석들녘 상강, 백석들녘 김춘기 긴 여름, 바람도 목이 마른 몽골 초원에서 대가족을 거느리던 쥐라기 어미공룡이 겨울 준비를 끝내고 앉아 있는 것 같은 한강봉이 마을 쪽으로 내려오고. 어머니 시집오실 때 가마의 뒤를 따라온 자욱한 안개로 새벽을 여는 26사단 쪽으로 가는 길의 너른 들판, 누.. 2012. 11. 2. 이전 1 2 3 4 5 ··· 1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