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밭314 빈 배/ 김춘기 빈 배/ 김춘기 밀물이 해안에 닿으면, 누군가를기다리는 낡은 구두 한 짝 닮은 배는먼 바다로 나갔다그렁그렁한 엔진소리만 몇 마디남겨 놓고 떠난 배밤새도록 파도 위에 낚시를 던졌지만구겨진 달빛 몇 조각과성단에서 떨어져 나온 잔별들만겨우 건져 올렸다여명과 함께 항구로 들어오는 것은 늘,허기와 수조 바닥이 보이는 빈 배 남자는 젊은 시절 대관령 비알밭에서고랭지 배추를 재배하였다파출부로 이골난 아내 통장에입금내역이 이따금씩 찍히긴 했지만풍년이면 가격 폭락에 속이 꽉 찬 자식들을갈아엎어야만 했고흉년이면 원금도 못 건져농협 빚 독촉 고지서만 날아왔다 그래도 만선의 꿈 꺾을 수 없었던 가장길을 바꾼 배추 유통업도친구에게서 덥석 물려받은 철물점도구불구불한 벼랑길로 이어졌다 늘그막 남자는빈 배에 쿨럭쿨럭 기침소리만 싣.. 2020. 10. 9. 강아지풀/ 김춘기 강아지풀/ 김춘기 제주 똥강아지들 섭지코지에 다 모였다 삽살개, 동경이 쌀강아지, 토종불개 은구슬 새아침 이슬 조롱조롱 매달고서 머리는 안 보인다 보이는 건 온통 꼬리뿐 종일 짖지도 않고 가을 하늘 젓고 있다 지중해 구만리 떠돌던 난민들이 식사 중이다 2020. 9. 28. 가을 택배/김춘기 가을 택배 김춘기 가을이 애월항 곁에 택배회사 차렸답니다 성산일출봉 아침 햇살 두 병, 우도 서빈백사 은물결 찰랑찰랑 세 양재기, 산양곶자왈 피톤치드 머금은 공기 되 가웃, 월령포구 노을로 빚은 약주 한 주전자, 새별오름 시월 그믐밤 별밭 반 평, 백록담 아래 물수제비뜨는 달빛 세 접시, 가파도 해녀할망 주름진 미소 한 보시기, 그리고 포장지에는 절물휴양림 은목서 향기 골고루 뿌려서 하늘로 보내드립니다 어머니 내일모레가 열 번째 기일이군요 2020. 9. 22. 아버지 속울음/김춘기 아버지 속울음 김춘기 우리 집 토종 칡소 새끼 낳았습니다 백일 지나 젖 뗀 송아지 우시장에 갔습니다 어미 소 꺼멍 두 눈은 호수가 되었습니다 연체이자 독촉장에 밤 지새던 아버지 여물에 콩을 넣어 쇠죽 끓이십니다 줄담배 피우시면서 매일 끓여 주십니다 2020. 9. 19. 이전 1 ··· 21 22 23 24 25 26 27 ··· 79 다음